산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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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걷힐 즈음에 꼭 가는 곳이 있다. 20여년 전, 당뇨로 돌아가신 장인어른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간다. 공식적으로는 한식날 가지만 그 뒤에도 두 번을 더하곤 했다. 장마가 끝나면 잡초들이 무성해서 보기가 민만해서 가게 되고, 겨울이 오기 전에는 좀더 예쁘게 단장을 하기 위해서 간다.

화분을 하나 사 들고 낫과 벌초기를 들고 뱀을 쫓기 위한 긴 막대기, 그리고 물통과 수건을 갖고 간다. 어떤 이들은 벌초는 한식날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한해 한번으로는 산소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없다. 앞에 심어둔 나무에 약도 뿌려야 하고 잡초를 뽑아 없애야 잔디가 곱게 자라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묘원을 오를 때가 나는 참 행복했다. 아내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산소에 가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아내가 기분이 우울해 있을 때는 어느 때고 산소엘 데리고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1년이면 10번 정도는 가기도 했다. 1시간 넘게 걸리는 포천을 오가며 나누는 이야기들이 포근함을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28일에도 나는 포천으로 향했다. 늘 옆자리에 앉아서 어렵던 과거를 회상하며 옛 노래를 같이 불러주던 아내와 쫑알거리며 희희낙락하던 뒷좌석의 두 딸이 없어서 서글프긴 했지만 산소로 향하는 마음은 마치 아내를 만나러 가는 느낌이어서 그리 외롭지는 않았다.

단골로 들르는 꽃집 아줌마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은 삽하고 낫을 갖고 가야 할텐데 빌려드릴까요?” “국화 화분이 며칠 전에 사다 놔서 꽃이 다 피어버렸는데 그냥 5천원만 내세요”한다. 일부러 따라주는 물 한 컵을 얻어 마시고 묘원으로 올라갔다.

늘 그랬듯이 차가 올라갈 수 있는 위치임에도 일부러 밑에 차를 대고 500여M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군인막사가 있던 자리에는 숲이 무성해 보이질 않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고추와 깻잎 밭, 합창하듯 울어대는 매미들, 그리고 울타리처럼 엮어진 오솔길만이 나를 반겨준다.

우리는 산길을 오르며 다른 산소에 대해 평을 하곤 했다. “저 산소는 묘 쓴지가 3년도 안됐는데 저렇게 풀이 무성하네?” “저 쪽은 첫해에는 부인과 며느리가 자주 찾아와서 산소를 돌보던데 2년도 안 되서 한번도 안 오네? 그 부인도 돌아가셨나?” “ 저 집은 20년 동안 단 한번도 성묘 온 사람을 본적이 없어. 산소가 패여서 보기가 좀 그렇지?” “ 저 위에 있잖아, 저 산소는 젊은 부부인데도 애들 데리고 와서 하루 종일 놀다 가.. 보기가 좋더라”

우리 식구 4명과 복돌이(시추)와 함께 올라가지만 늘 작은 딸과 복돌이는 저만큼 앞서 간다. 복돌이가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열심히 뛰어 오르기 때문이고, 작은 딸은 복돌이와 보조를 맞추느라 같이 뛰기 때문이다. 큰 딸은 역시 장녀라서 엄마를 부축하며 소곤소곤 여자들만의 대화를 나누며 뒤 따라 오곤 했다. 그리고 나는 늘 중간쯤 가면서 교통정리를 했다.
그날도 내 눈에는 그 모습 그대로 가고 있는 듯 했다.

언뜻 정신이 들면 아무도 오르내리지 않는 산길에 내 발자욱 소리만 처벅처벅 들린다. 벌써 풀이 무성해진 산소를 보니 아내가 서운해 했을거란 생각이 먼저 든다. “딸 만나니 좋아요? 잘 보살펴 주고 계시지요?” “머리 깎아 드릴려고 왔는데 답답하셨지요?” “당신께서 귀여워 해주시던 손녀딸이 내일 치의대대학원 시험치는 날인데 도와주실거죠?”

잡초를 뿌리 채 뽑아내고 비석을 닦고 바깥부분부터 벌초를 해 올라간다. 두더쥐가 파 놓았는지 부풀어 있는 곳은 발로 꼭꼭 밟아서 다졌다. 가끔씩 불어오는 초가을바람에 풀잎들의 부딪힘이 정겹게 느껴진다.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서쪽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진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 오면 그냥 맞고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입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3시간 쯤 지나서야 대충 마무리가 됐다. 미리 가져간 병커피와 담배 한개피로 장인어른께 끝났음을 알렸다.

처가인 시드니로 전화를 했다. 말씀은 안하시지만 장모님은 늘 산소걱정이 많으셔서 왔다간다는 전화를 드려야 안심을 하시기 때문이다. “고맙네..” 별다른 말씀은 못하시고 울먹이시다가 이내 전화를 끊으신다.

“딸 잘 보살펴 주셔야 해요..꼭이요!” “고생만 시키다가 보내서 미안해요” “금세 다시 올게요…”장인어른께 인사를 하고 터벅터벅 내려오는 오솔길에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참았던 비가 쏟아져 내린다.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