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받지 못한 죽음

코로나로-죽은-삶의-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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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코로나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글을 ‘이방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상상해서 쓴 글이었는데 아래 글은 직접 경험한 분의 선한 이야기가 있어 가슴이 뭉클합니다. 산 자들이 보면 많은 깨달음이 있을 것 같고, 저 또한 그랬기에 여기 옮깁니다.-이방인-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구를 덮친 지난 2월 말,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강봉희(67) 단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2005년부터 고독사나 기초생활수급자 등의 장례를 무료로 대행해 온 염장이. 대구시 코로나 상황실에서 건 전화였다. 그런데 “부탁할 게 있습니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일종의 ‘조난 신호(SOS)’였다.

강 단장은 급히 시청으로 달려갔다. 상황실 공무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병원에서 코로나로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시신에 손댈 사람이 없습니다. 단장님이 저희 좀 살려주세요.” 서둘러 화장(火葬)해야 하는데 감염될까 봐 의료진도 장례업자도 나 몰라라 회피한다는 것이었다. 강 단장은 즉답했다. “알았어. 내가 해줄게.”

그날부터 4월 초까지 코로나 사망자 23명의 마지막 길을 그가 배웅했다. 누적 사망자가 200명에 이른 그 무렵, 10%가 넘는 시신을 한 염장이가 수습한 셈이다. 지난 11일 대구 중구청 앞 봉사단 사무실에서 만난 강 단장은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고관절 수술이 잘못돼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4cm나 길어져버렸다”고 웃어넘기는 그에게 코로나 사망자를 만지기가 무섭지 않았는지부터 물었다.

“염장이는 남이 안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단한 뜻은 없었어요. 저도 두렵고 섬뜩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가 서류 뭉치를 꺼냈다. 사망진단서 23장이었다. 김ΟΟ, 정ΟΟ, 이ΟΟ, 배ΟΟ, 류ΟΟ···. 이름과 주소는 제각각이었지만 사인(死因)은 한결같이 ‘코로나’였다.

-사인이 무엇이건 염장이에겐 다 같은 죽음 아닌가요.

“겪어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코로나 사망자는 여느 죽음과는 정반대였어요. 일반적으론 사후 24시간이 지나야 화장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망자는 감염 우려 때문에 24시간 안에 화장을 마쳐야 해요. 3일장 치르고 화장장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선(先) 화장 후(後) 장례’입니다. 격리되는 바람에 임종을 못 지키고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른 경우가 많아요.”

-염습도 불가능하겠군요.

“염(殮)은 ‘묶는다’, 습(襲)은 ‘목욕시키고 갈아입힌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환자가 병원이나 자택에서 사망하면 저를 포함해 봉사단원 두세 명이 방호복을 입고 현장에 들어갔어요. 옷은 벗기지도 않습니다. 시신 그대로 이중 비닐 팩으로 싸요. 밀봉하는 거예요. 다시 시신 팩에 담고 관에 넣어야 해서 염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염장이를 불렀습니까.

“코로나 초기에는 대형 병원이나 요양 병원이나 시신을 만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시신 팩에 넣는 것까지는 의료진이 해야 해요. 그런데 의사는 사망 확인만 합니다. 간호사는 무섭다며 물러서고 장례업자들도 내뺐어요. 감염 공포로 벌벌 떨던 때였으니까요. 결국 봉사자인 저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일에도 범위가 있는데 단장님은 어디까지 맡았나요.

“먼저 망자를 겹겹이 밀봉해 입관하고 화장장으로 운구합니다. 유족은 밀접 접촉자이거나 확진자인 경우가 많아요. 모두 격리 중이라면 유족 대신 제가 화장장에 있어야 합니다. 유골을 유족에게 바로 건넬 수 없을 땐 시에서 운영하는 납골당에 임시로 안치하는 것까지가 제 일이었어요.”

-다들 꺼리는데 어떻게 용기를 냈습니까.

“저도 꺼림칙했어요. 가까운 의사들에게 물었는데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가 힘을 못 쓰니 보호 장비만 잘 갖추면 안전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짜가? 잘못되면 니가 책임져라!’ 하고 들어갔습니다(웃음). 그냥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 거예요. 코로나 사망자를 거둔 제가 멀쩡한 걸 보곤 마음이 놓였는지 4월부터는 의뢰가 거의 끊겼고요.”

-화장장에서는 영정도 위패도 없이, 관이 지나간 자리마다 소독약을 뿌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코로나는 죽음 이후의 시간도 재촉했어요. 어떤 망자는 오후 3시에 사망해 오후 6시에 화장했으니 3일장은커녕 세 시간 만에 죽음이 정리된 거예요. (‘황망하다’고 하자) 코로나로 돌아가신 분은 죽음이라 할 수도 없어요. 방역 매뉴얼에 따라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간 거예요. 애도받지 못한 죽음입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

“망자의 큰아들은 격리돼 있었고 따로 사는 작은아들이 달려온 일이 있었습니다. 저한테 ‘아버지 얼굴 좀 보여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시신은 밀봉돼 관 속에 있는데 어떡합니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결관(結棺)한 걸 다 풀어헤치고 시신 팩과 비닐 팩을 열었어요. 방호복 입고 5m 밖에서 아버지 얼굴을 보며 아들이 흐느끼는데 나도 미치겠더라고. ‘수의를 입혀줄 순 없냐’고 하길래 수의를 잘 펴서 관에 넣어만 드렸어요. 화장이 끝나자 제 손을 붙잡곤 ‘고맙다’고 또 울더라고요. 어떤 분은 멀쩡한 정신으로 걸어서 입원하셨는데 열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가족 얼굴도 못 보고, 유언도 못 하고. 돌아온 건 재(유골) 한 줌이에요.”

◇시한부 판정으로 바뀐 인생

강 단장은 한창때 건축업을 했다. 인부를 고용해 4~5층짜리 상가를 지어주고 이문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는 “건물이 잘못 지어지면 다 때려 부수고 다시 올릴 만큼 완벽주의자라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1997년 방광암 판정을 받았다.

-얼마나 위중했나요.

“너무 늦게 발견해 종양 지름이 3cm가 넘었어요. 의사는 비관적이었습니다. ‘석 달도 살기 어려울 것’이라 했어요. 경북대 병원이었는데 병실 창밖으로 장례식장이 보였습니다. ‘나도 저렇게 가나 보다’ 생각했지요.”

-40대 중반이면 인생의 대낮인데.

“어릴 적부터 저는 삶에 대한 애착이 약했어요. 언제까지 뭘 꼭 해야지, 그런 생각도 없었고요. (‘처자식이 있지 않으냐’고 묻자) 집사람과 아들딸을 두고 가야 하니 충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암 덩어리를 수술로 도려내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투병 기간이 길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다 나았어요.”

-병상에서 어떤 다짐을 했습니까.

“허무하더라고요. 길어야 석 달이라니 인생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어요. 뭘 하면서 마지막을 정리할까 궁리하다 ‘남이 안 하는 것, 가장 하기 싫어하는 것’에 끌렸습니다. 그게 염장이었어요. 이 병원에서 두 발로 걸어 나간다면 장례 지도사가 돼 봉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리지 않던가요.

“집사람이 질색했지요. ‘세상에 많고 많은 봉사 중에 왜 하필 염장이냐’고. 요즘엔 집사람이 봉사단 사무실에 가끔 와서 서류 작업을 도와줍니다. 시신을 마주하고 만지는 일이라며 지금도 싫어하지만 제 고집을 못 꺾어요. 요즘 유행어로 하면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웃음). 장례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안동 도산서원에서 예절 지도사 자격증도 땄어요. 2005년 장례 봉사를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건축업 다 접고 이 일만 했어요.”

-모아둔 재산이 있었나 봅니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던데, 봉사는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합니다. 재산은 30평짜리 단독주택과 8년 된 자동차, 통장 잔액 1000만원뿐이에요. 숨이 끊어진 사람을 자주 접하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뀌었습니다. 소유욕이 점점 없어져요. 뭘 가지려고 애를 안 써요. 위를 보면 힘들지만 아래를 보면 저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아주 많아요.”

-염장이가 결혼식장에 나타나면 부정 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만.

“제 아들딸은 결혼 잘하고 자리도 잡았습니다. 그게 생각 차이예요. 생졸(生卒·태어나고 죽음)은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고 혐오하는 게 문제죠. 염장이는 옛날부터 가장 천한 직업이었어요. ‘귀신은 오지 말라’는 뜻으로 시신을 끈으로 묶고 먼 곳에 묻었잖아요. 그렇게 죽음과 거리를 두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남의 죽음을 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요. 장례업자들은 더 벌겠다고 별짓 다 합니다. 쓰지 않아도 될 물건을 사게 해요. 상주들에게 ‘장난’을 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의도 그래요. 우리가 수의를 입기 시작한 게 1800년대 말부터예요. 장례업자들의 발명품과 같아요. 그 옛날에는 다 평상복을 입고 갔습니다. 입관할 때 노잣돈을 요구하더니 이젠 꽃장식도 등장했잖아요. 대구에서는 운구차 비용이 15만원이었는데 지난 2~3월 코로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할 땐 ‘위험 수당’이라며 50만원을 불렀어요. 장례식장에선 이쑤시개 하나도 돈입니다.”

-장례 봉사를 할 땐 수의도 안 입히나요.

“안 입히면 난리가 나요. 일단 관습이 되면 거스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깁니다. 한국 사람은 남의 이목을 신경 쓰잖아요. 상주들도 대세를 따르길 바라죠. 다만 저는 시신에 화장(化粧)은 안 합니다. 장례는 결국 산 자들의 놀음이에요. 주름살과 검버섯을 지우면 유족 마음이 편하겠지만 고인은 몰라요. 저는 잘 닦아 깔끔하게 보내드립니다.”

-봉사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건축업자로 살 땐 성격이 날카로웠어요. 그래서 암에 걸렸겠지요. 봉사만 하고 산 뒤로는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얼굴도 편안해졌어요. 속된 말이지만 ‘봉사에 빠지면 섹스보다 무섭다’고 하잖아요. 끙끙 앓다가도 ‘봉사하러 가자’고 하면 벌떡 일어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봉사의 매력은 단순해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무료 장례 경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나요.

“봉사단 회원이 300명인데 회비로 운영합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는 장례비(80만원)가 나오는데 유족이 고맙다며 그 돈을 후원해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구멍이 생기면 열정적인 집행부에서 메웁니다. 제 생활비요? 국민연금이 나오고 아들딸에게 용돈을 받아요. 매달 20일에 통장에 돈이 안 들어오면 제가 문자를 보냅니다. ‘느그 아버지 굶어 죽는다!’ 하하하.”

강봉희씨의 장례 무료 봉사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무연'(감독 신상훈). 고령화 사회의 한 단면인 고독사 문제를 관찰한 영화다.

◇고독사의 마지막 목격자

그는 장례 봉사를 1년에 100번 정도 한다. 크게 세 부류다. 장례비가 부담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60%, 무연고자가 30%, 고독사가 10%. 이날도 무연고 망자(66세 남성)의 장례를 치르고 온 길이었다. 강 단장의 봉사는 2014년 ’무연(無緣)’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기기도 했다. 고령화 사회의 한 단면인 고독사 문제를 관찰한 영화다.

-고독사와 무연고 사망은 어떻게 다른가요.

“고독사는 혼자 살다 돌아가신 경우인데 가족이 나타나 장례에 관여합니다. 무연고 사망은 가족이 있는데 시신 인수를 포기하고 장례에도 관여하질 않아요. 무연고 시신으로 분류되면 상주도 조문객도 없는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오늘 염한 고인은 어떤 분이었나요.

“지난 4일 대구의료원에서 돌아가셨는데 기다려도 가족이 시신을 안 찾아갔답니다. 집안 사정을 알 순 없지만 ‘시신 포기 각서’를 썼고요. 북구청 연락을 받고 저희가 봉사를 했습니다.”

-고독사나 무연고 주검을 마주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염해드리는 분들은 끝이 좋은 분들은 아닙니다. 가난은 기본이고 인생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니 고독사로 뒤늦게 발견되거나 가족이 시신 인수마저 포기하겠지요. 그래도 이웃과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사실 살아 있을 때부터 잊힌 존재들이에요.”

-그런 망자들은 어떤 표정인가요.

“얼굴은 다 평온해요. 코로나로 사망해도 매한가집니다. 본모습으로 돌아간 셈이니 인상 찡그리고 그런 거 없어요. 고독사로 아주 늦게 발견돼 시신이 훼손된 경우만 아니라면 다 똑같아요. 고인 표정만으론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구별이 안 됩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죽음 앞엔 모두 평등한데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글쎄요. 죽음이 좋을 수는 없겠지요. 다만 임종을 여럿 지켜보니 죽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가족과 인사 다 나누고 가장 편하게 가시더군요. 죽음을 못 받아들인 분들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가족에게 역정을 내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사실 안 죽을 것처럼 살잖아요.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질 겁니다.”

-급속한 고령화와 가족 형태 변화로 홀로 죽음을 맞는 노인이 급증하고 있는데(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무연고 사망자는 총 9734명. 이 중 4170명은 65세 이상이었다).

“제가 만나는 죽음 대부분은 살아 있을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독사한 분이 3개월이나 방치됐다는 뉴스를 보고서야 사람들은 분노하지요. 죽고서 찾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좀 관심을 가져주세요. 동네마다 자율 방범대 다 있잖아요. 이틀에 한 번 문 두드리며 ‘어르신, 안녕하시지요?’ 안부만 여쭤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관 뚜껑을 닫으면서 고인에게 어떤 말을 하나요.

“다 내려놓고 안녕히 가세요. 속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훗날 그날이 올 때 어떻게 가고 싶습니까.

“저희 부부는 연명 치료 거부 서약을 했어요.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염도 하지 말고 화장하길 바라지만, 죽은 다음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잖습니까(웃음). 다만 수의는 싫어요.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는 잠바가 제일 편해요.”

이 염장이가 자주 간다는 대구 명복공원(시립 화장장)으로 향했다. 시신을 화장하는 데 쓰는 가마(화장로)가 11개 있었다. 대구 코로나 사망자는 모두 이곳을 지나갔다. 목관이 다 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00분. 유족에겐 한 되 남짓 뼛가루만 돌아왔다.

/대구=박돈규 기자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서 가져왔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사라 나눠 읽고 싶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12/19/ZZLVQUW7EFA4NNFIM7RWIKDR3Y/